배명식목사 (원동교회)
내가 처음 시골교회로 내려 간것은 서울에서 교육전도사로 있다가 사임한 한달 후의 일이다. 1993년도의 일이다.당시 나는 서울의 강남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J목사님을 도우면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다.한국스테인드그래스(주)라는 직장에서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다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소명의 시간을 갖고, 오직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신학공부를 사작했지만 전도사의 일터는 열악한 경제적인 여건은 물론 일할 의욕마저 상실할 때가 많았다.아내의 형부된 U목사님이 시무했던 전북 부안으로 내려 간것은 그해 겨울에 부흥회를 한주간 갖게 되면서 인연이 되었다.
고향 광주를 떠나온 이후 시골생활을 처음하게된 나는 시골의 풍경이 아름답고 흙과 함께 사는 일에 감사와 찬양으로 보내며 꿈꾸는것같이 보냈다.그러다가 몇해가 지나면서 정해진 사례비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서울에서 가져온 전세금이 바닥이 나고,아내는 영양실조에 간염을 앓게 되었다. 읍내의 의사는 자신이 손을 쓸수가 없으니 전라도 어느 섬에 있는 요양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딸아이도 열병으로 앓고 의사에게 보였는데, 사망선고를 내렸다.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나는 기도밖에 할수없었다.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아내는 회복되고, 딸아이는 찬송하면서 기적이 일어났다.얼마후에 지은지 몇해 안된 교회가 비가 새기 시작 했다. 비가 새는 교회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헌금을 보내 줄것을 요청하고 있을 무렵 교회 내부 문제가 일어 났다.교회가 없는 마을에 첫 목회자가 교회건축을 하고 목회자를 괴롭히는 K서리집사에게 시달리면서 떠나가고, 두번째 목회자가 아내의 형부였는데,그 는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백고로 치고 화를 달래다가 다른 교회로 부임하여 갔고, 나는 세번째 찾아온 목회자인셈이었다.전임목회자가 해결 못하고 간 문제는 후임목회자가 떠안게 마련이다.나는 전임목회자들의 조언으로 그에게 집사직분을 주지 않았다.재직회에 참석하지 못한고 소외된 그는 다른 방법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역자의 길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동네 불량한 청년을 시켜 교회 유리창을 다 부수고 가는가 하면, 주일 오전 예배에 큰 나무를 휘젖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내가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사이에는 아내와 딸만 있는 사택을 한밤중에 구두신은체 들어와서 교회를 떠나라고 괴롭히기도 했다.그러다가 그의 누나라고하는 사기꾼으로 떠돌다가 온 여전도사를 심방전도사로 임명해달라는 요구가 관철이 되지 않자, 내가 없는 평일에는 교인 집들을 심방다니며 안수기도해주고, 감사헌금을 걷고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일이 발생되었다. 교회는 그러한 일에 대처능력이 없었다.급기야 교인 반이 회유되어 따로 집회를 갖고, 다각도로 나를 내몰기 위한 일이 매주 일어났다.여러차례 권유와 심방으로 설득했지만 거역의 새술에 취한 사람들은 얼굴빛부터 다른 사람들이 되어 갔다.나는 작정기도를 시작했고, 다른 교역자들 처럼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그로부터 11계월이 지나고, 내 기도소리가 온마을을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한사람씩 찾아와 "전도사님, 절대로 이곳을 떠나시면 안됩니다.저 K씨는 오는 사람마다 괴롭히는것 우리 알고 있습니다.양식이 모자라면 우리가 갇다 드릴테니 걱정마시고 계세요." 그렇게 마을사람들이 위로해 주었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어려운 와중에도 교회는 변함없이 전도하고 성장해 나갔다.매일 남은 교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말 자발적으로 새벽기도와 오후에 기도하고 돌아갔다. 학생들도 학교만 갔다오면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나서 집으로 갔다.어느 금요일에 나는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방언과 방언찬양이 터져나왔다.그날부터 잠꼬대도 방언으로 했다.그 주일에는 전교인이 방언하고 통역하고 예언하고 병고치는 능력과 여러 은사를 경험했다.예배 도중에 한아이가 일어나 "교회를 떠난자들을 무섭게 징계할것을"말하였다. 그 예언대로 따로 모인 집을 제공한 집사를 눕게하더니 병명을 모르니 치료할 길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떳다. 가기전에 철저하게 회개했지만, 막상 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자녀들이 내가 죽였다며 핍박을 시작했다. 떠나간자들이 그집의 초상이후 한사람씩 돌아왔다.
교회는 평안을 회복하고, 몇달이 지났는데 갑자기 주일날 당회장이란 C목사가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시무정지를 내렸다.읍내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잘?지 않아 시무할 교회를 물색하던중 내가 시무하는 교회소식을 듣고 전도사를 내보내고 자신이 들어올려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러나 교인들의 단합으로 계획이 좌절되자 법을 전공했다는 그는 노회에다 거짓고소를하고, 경찰서에 아는 친척을 이용해 '사신공개죄'라는 죄목으로 고소를 했다.노회에 보낸 고소장이 교회로 되돌려 오고, 교회로 온 우편물들을 간난아이가 뜯어버려서 비로서 그가 노회와 세상법정에까지 고소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노회에다는 내가 교인들을 사주해서 자신을 폭행할려고 했다는등 말도 안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목사의 악한 일에 대해 먼저 당회장인 P목사님께 호소했더니 자신도 이해할수없는 상식밖의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당회장권도 그가 갑자기 노회장과 협의해서 가져갔다는 것이었다. 얼마후에 노회 전권위원이 모였다.교인들의 정황을 들은 전권위원들은 그 목사의 일방적인 사기극임을 밝혀내고, 나에게는 '수고한다'는 말한마디만 남기고 떠났다.그 목사의 고소장에는 내가 교회벽에 성화를 붙인 것이 큰 죄목으로 기재되었고, 학생들을 위한 <문학의밤> 행사에 피아노를 교회마당에 내어 연주를 한것이 죄라고 쓰여 있었다.그때 복음성가 가수 전용대와 음악교수로 있는 친구들을 불러 200명 가까이 찾아온 학생들을 수용할수 없어, 저녁에는 교회마당으로 피아노를 이동하고 새벽 4시까지 연주회를 계속했다.후일 전용대는 전국을 돌고 세계를 다녀봤지만, 그날밤같은 시골교회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찬양과 간증으로 보낸 은혜의 시간이 없었다고 간증했다.
나는 그곳에서 4년을 목회하다가 신대원을 마치고, 다른 임지를 주시도록 기도했다.매주 신대원으로 가는 길은 기적의 역사였다. 월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면, 차비도 없이 4km를 걸어 읍내로 나갔다. 정류장에 앉아 서울로 공부할수 있도록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매달 나오지 않는 사례비는 하늘나라에 저금하고, 양보하지 못할 일은 학교가는 일이었다. 그런데 매주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누군가가 끊어 주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어김없이 누군가가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목회자는 엎드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그리고 기도의 학과를 철저히 배워나가는 학습장이요, 단련의 세월이었다.*****[계속}
